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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아이코닉] 선수시절 과르디올라는 어드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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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웅기야쫌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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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시절 과르디올라는 어드정도였을까.jpg [풋볼 아이코닉] 선수시절 과르디올라는 어드정도였을까?

펩 과르디올라는 선수로서 얼마나 훌륭했을까?
 
엘리트 축구 선수로 활약한 뒤 은퇴 후 감독으로서도 엘리트 반열에 오른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르친다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떤 일을 잘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말을 한 뒤에도, 이 두 가지 영역을 모두 완벽히 해낸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요한 크루이프다. 그는 선수로서, 또 지도자로서도 환상적이었고, 축구 전체에 끼친 그의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인물은 그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할 인물은, 아마 크루이프의 제자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일 펩 과르디올라다.
 
지도자 커리어 동안 그는 유럽 전역을 거의 제패했다. 그러나 요즘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감독이 되기 전, 선수 시절의 과르디올라다.
 
자, 그렇다면 과르디올라는 선수로서 정말 얼마나 훌륭했을까?
 
 
 
 

겸손한 카탈루냐의 시작

1971년, 펩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네 남매 중 셋째로, 두 명의 누나와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동네에서 ‘축구광’으로 불릴 만큼 축구에 열정적이었다. 집 근처 들판에서 몇 시간이고 공을 차며, 놀곤 했다.
 
그의 축구 사랑은 결국 13세이던 1984년, 바르셀로나 유스 라 마시아에 입단하게 만들었다. 또 어릴 적엔 바르셀로나 구단의 볼보이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바르셀로나와 얼마나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1986년 코파 델 레이 우승 당시, 어린 펩이 바르셀로나 감독이던 테리 베너블스 옆에서 함께 우승을 축하하는 사진이다.
 
 
 
 

유스와 초기 성장

13세부터 19세까지, 과르디올라는 라 마시아에서 자신의 실력을 다듬고 축구적 지능을 발전시켰다.
 
유소년 단계에서 그는 경기 지능이 뛰어나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지만, 16세쯤이 되어서야 자신의 주 포지션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988년, 바로 그 해 요한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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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따르면, 크루이프는 부임 며칠 만에 예고 없이 유소년 경기장을 찾았다고 한다. 전반전이 끝난 뒤, 당시 유소년 감독에게 다가가 오른쪽 미드필더로 뛰던 한 스페인 선수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저 선수를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로 옮겨보게.”
 
눈치챘겠지만, 그 선수가 바로 펩 과르디올라였다.
 
수비형 미드필더, 즉 피보테 포지션은 매우 높은 축구 지능과 기술을 요구하는 어려운 역할이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 축구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던 자리였다.
 
그럼에도 과르디올라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했고, 이후 거의 전 커리어를 이 포지션에서 보냈다.
 
그는 신체적으로 강하거나 빠른 선수는 아니었지만, 탁월한 패싱 능력, 볼 컨트롤, 그리고 뛰어난 경기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데뷔와 드림팀 시대

1990년으로 가보자. 이때쯤 크루이프는 자신의 전술 철학을 바르셀로나에 완전히 이식했다. 그것은 ‘토탈 풋볼’이라 불리는 시스템이었다.
 
이 철학은 크루이프가 널리 알렸지만, 그 기원은 1930년대 오스트리아 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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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 풋볼은 점유율을 중시하고 공격적인 시스템으로, 높은 수비 라인과 포지션의 자유로운 교체가 특징이다. 보통 4-3-3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하며, 그 중앙에는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이 위치한다.
 
과르디올라는 바로 그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배치되었다. 그는 1990/91시즌에 1군 데뷔를 했고, 본격적인 주전 자리는 1991/92시즌부터 차지했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는 완전히 새로워졌다. 미카엘 라우드루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로날드 쿠만, 호마리우 같은 스타들이 합류하면서, 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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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부터 1994년까지, 이 팀은 라 리가 4연패, 스페인 슈퍼컵 3회, UEFA 슈퍼컵 1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의미 있는 업적은 1992년 유러피언컵(現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다.
 
이 우승은 바르셀로나 역사상 첫 유럽 챔피언 등극이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이미 1955년에 첫 우승을 차지한 걸 생각하면, 바르셀로나의 첫 우승이 얼마나 늦게 찾아온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즌은 과르디올라의 첫 풀시즌이었다. 당시 20세였던 그는 유럽대항전 모든 경기에 출전했고, 라 리가에서도 38경기 중 26경기에 나섰다. 놀라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크루이프의 퇴임

그 후 몇 년 동안 바르셀로나는 구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다. 크루이프는 재임 기간 동안 무려 11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당시까지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다 우승 감독이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기록을 훗날 펩 과르디올라가 자신의 지도자 시절(2008~2012) 15개의 트로피로 넘어섰다는 점이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1996년 당시 구단주 주제프 루이스 누녜스와의 불화로 사임했다.
 
그가 과르디올라에게 끼친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토탈 풋볼’의 개념은 훗날 과르디올라가 지도자로서 전 세계에 전파하게 되는 철학의 뿌리가 된다.
 
과르디올라는 이렇게 말했다.
“크루이프는 성당을 지었다. 우리의 일은 그것을 보수하고, 계속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크루이프 이후

크루이프가 떠난 뒤, 바비 롭슨 경이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 시즌 바르셀로나는 코파 델 레이, UEFA 컵 위너스컵, 스페인 슈퍼컵을 모두 제패하며, ‘컵 트레블’을 달성했다. 이때 루이스 피구와 호나우두 페노메노가 새로 합류했다.
 
과르디올라는 이 시즌에 무려 58경기에 출전했고, 리그와 컵 거의 모든 경기에서 뛰었다.
 
1997년에는 롭슨이 단장직으로 옮기고, 루이 반 할이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첫 시즌인 1997/98시즌, 바르셀로나는 다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과르디올라는 26세의 나이에 팀의 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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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종아리 근육 부상으로 대부분의 시즌을 결장해야 했다.
 
다음 98/99시즌에는 부상에서 복귀해 바르셀로나를 또 한 번 라 리가 우승으로 이끌었다. 5년 만에 두 번째 리그 2연패였다.
 
하지만 그 뒤 두 시즌(1999~2001)은 좋지 않았다. 종아리 부상과 함께 발목 부상까지 겹치며, 출전 기회가 줄었고, 팀 역시 그 기간 동안 단 한 개의 트로피도 따내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와의 이별

2001년 4월 11일, 과르디올라는 17년간 몸담았던 바르셀로나를 떠난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그는 1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축구는 점점 더 육체적인 선수들과 전술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웃긴 일이다. 그가 나중에 감독으로서 전 세계를 제패할 때 사용한 바르셀로나 팀에는 힘이 센 선수는 거의 없었다. 메시는 물론, 차비와 이니에스타도 순전히 기술력과 두뇌로 상대를 압도했다.
 
 
 
 

바르셀로나 이후

바르셀로나를 떠난 뒤, 과르디올라는 커리어의 황혼기에 접어든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브레시아와 로마에서 3년간 뛰었으나, 잦은 부상으로 세 시즌 동안 단 28경기만 출전했다.
 
이후 카타르의 알아흘리에서 2년을 보내고, 멕시코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에서 1년을 보낸 뒤 2006년 은퇴를 발표했다.
 
 
 
 

지도자로서의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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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과르디올라는 우리가 모두 아는 대로, 역대 가장 성공적인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현재까지 감독으로서 30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며, 선수 시절의 업적을 훨씬 능가했다.
 
스페인, 독일, 잉글랜드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지금도 그의 행진은 멈출 기미가 없다.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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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과르디올라를 바르셀로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수들 중 한 명으로 부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탁월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두뇌와 기술로 팀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있던 바르셀로나는 훗날 구단의 ‘승리 DNA’를 구축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는 크루이프의 철학을 이어받아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에게 완전히 주입했다.
 
사실, 과르디올라는 은퇴할 때 이미 바르셀로나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감독직에서 은퇴할 때쯤이면, 그는 아마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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