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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아이코닉]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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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jpg [풋볼 아이코닉]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그는 실제로 얼마나 대단했을까?]
 
오늘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긍정적인 내용이었지만, 그의 커리어 동안 일어난 일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꽤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소속 팀에서 내쫓기듯 떠나야 했던 선수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유럽 주요 리그에서, 서로 다른 두 구단 소속으로 연속된 두 시즌 동안 ‘트레블(리그, 컵, 챔피언스리그 3관왕)’을 달성한 선수 역시 거의 없다.
사실상, 그런 일을 해낸 선수는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사무엘 에투다.
 
아마도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수출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주장은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소속 팀과 대표팀 모두에서 미친 듯한 성과를 올렸으며, 그 과정에서도 언제나 스타일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너무 앞서가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도대체 사무엘 에투는 어떻게 그런 위치까지 올라갔고, 거기서 무엇을 이루었으며, 그는 그만큼의 대우를 받았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 그는 실제로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을까?
 
 
 
 

초기 시작

많은 최정상급 축구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사무엘 에투의 이야기는 겸손한 출발점에서 시작되었다.
카메룬 태생인 그는 어려서부터 축구에 대한 타고난 사랑과 열정을 품고 있었다. 11살 무렵부터 그는 카메룬 두알라의 카지 스포츠 아카데미에서 뛰었다.
 
그는 매일, 그리고 밤낮없이 축구를 하며, 이 스포츠에 완전히 몰입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에투의 말에 의하면,
 
“나는 축구를 숨 쉬듯 사랑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분들은 축구란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물론 에투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는 더더욱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축구를 하기 위해 몰래 집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가 경기 중이던 운동장 바로 옆 술집에서, 아버지가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이 ‘몰래 뛰기’는 예상처럼 나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부모는 이전까지 에투가 실제로 경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를 직접 본 순간, 사무엘 에투는 다시는 몰래 축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부모는 즉시 아들의 재능이 진짜임을 깨달았다.
그때 에투는 겨우 14살이었다.
 
그리고 단 2년 뒤, 그는 유럽으로 향해 레알 마드리드 유스에 입단했다.
 
 
 
 

어린 에투는 얼마나 잘했을까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 1.jpg [풋볼 아이코닉]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잠시 시간을 내서, 그의 실력을 이야기해보자.
키는 약 180cm, 날렵하고 빠르며, 민첩한 공격수였다.
주로 스트라이커로 뛰었지만, 실제로는 공격 전 지역에서 활약할 수 있는 선수였다.
 
팀플레이 감각, 양발 사용 능력, 왕성한 활동량,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그리고 마무리 능력 —
이 모든 것이 그의 커리어 전반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두드러졌다.
 
하지만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의 삶은 기대와 달리 순탄치 않았다.
그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1군이 아닌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2군)’에서만 훈련할 수 있었다.
 
곧이어 레알 마드리드 B팀은 스페인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당시 규정상, 비(非)EU 선수는 3부 리그에서 뛸 수 없었다.
그리고 에투는 비EU 선수였다.
 
큰 문제였다.
 
해결책은? 임대였다.
그는 먼저 2부 리그의 레가네스로 임대되어 28경기에서 3골을 기록하며, 경험을 쌓았다.
16살 선수로서는 충분히 값진 기록이었다.
 
이후 에스파뇰로 임대를 갔지만 단 한 경기만 뛰었고,
마침내 마요르카로 보내져 꾸준히 출전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결국 16세에서 19세까지, 그는 레알 마드리드 1군에서 단 3경기만 뛰었다.
꿈의 무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0년, 마요르카로 완전 이적이 확정되었을 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드리드에서 받았던 대우를 평생 잊지 않았다.
이건 나중에 다시 중요해진다.
 
 
 
 

스타의 등장

당시 에투는 19살이었다. 마요르카에서 뛰기 시작한 그는 이곳에서 진정한 이름값을 세우게 된다.
이적료는 약 £4.4m였는데, 그가 팀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헐값이었다.
 
첫 시즌(2000년)에 13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3년 후, 2003년에는 마요르카가 9위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22살의 에투는 이미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쌓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마요르카에서 4번째 시즌에 14골 2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같은 해, 마요르카는 구단 역사상 첫 번째이자 유일한 코파 델 레이(국왕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에투는 8강전에서 자신의 옛 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고,
결승전에서도 두 골을 넣었다.
이 트로피는 지금까지도 마요르카 구단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타이틀이다.
 
그는 경기장 안에서만 빛난 게 아니었다.
마드리드 시절과 달리, 팬들과 구단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랑을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난 마요르카가 좋다. 이곳에서는 늘 잘 대접받았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결승전은 중립 구장에서 열렸기 때문에, 팬들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에 에투는 팬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사비 €30,000를 들여 원정 팬들의 식사비를 전부 부담했다.
정말 ‘좋은 남자’였다.
 
국가대표팀에서도 놀라운 활약을 이어갔다.
2000년과 2002년, 카메룬은 연속으로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을 우승했다.
에투는 19세의 나이로 2000년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올림픽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이쯤 되면 그는 문자 그대로 ‘세대를 대표하는 재능’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직 이야기의 절반도 아니다.
 
이후 2003/04 시즌, 그는 32경기에서 17골 1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 최고 시즌을 보냈다.
당연히, 빅클럽들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중에는 옛 팀 레알 마드리드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
에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와 마드리드의 관계는, 한 남자가 자신을 외면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같다.
그런데 그 남자가 떠나기로 결심하자, 여자가 갑자기 그를 쫓기 시작하는 거지.”
 
납득할 만한 말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가 마드리드행을 거부한다면, 어디로 갈까?
그 대답은 너무나 자명했다.
 
 
 
 

사무엘 에투: 바르셀로나의 전설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 2.jpg [풋볼 아이코닉]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2004/05 시즌 시작과 함께, 에투는 공식적으로 바르셀로나의 일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커리어는 말 그대로 ‘미쳐버린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부진의 늪에 빠져 있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6년간 아무 트로피도 들지 못한 팀이었다.
 
감독들은 실망을 안겼고, 보드진은 무능했으며,
팀의 전설적인 선수들도 하나둘씩 떠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곧 바뀌게 된다.
에투가 오기 1년 전, 호나우지뉴, 이니에스타, 발데스가 1군에 합류했고,
2004/05 시즌에는 메시, 데쿠, 라르손, 그리고 에투가 가세했다.
 
이 조합을 상상해보라.
라 리가 수비수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예상대로, 바르셀로나는 다시 최정상으로 복귀했다.
그 중심에는 에투가 있었다.
 
그가 온 첫 두 시즌 동안, 바르셀로나는 라 리가 2연패를 달성했다.
에투는 두 시즌 합계 71경기에서 51골(12도움)을 기록했다.
팀 내 최다 득점자이자, 라 리가 2연속 득점왕.
그야말로 미친 성과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게다가 첫 우승 시즌 우승 세리머니에서 그는 팬들과 함께 이렇게 외쳤다.




“Madrid, cabrón, saluda al campeón!”


(“마드리드 개자식들아, 챔피언에게 인사해라!”)

당연히 그의 옛 팀은 분노했다.
 
이 시기의 절정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었다.
바르셀로나는 결승에서 아스날을 2대 1로 꺾으며, 통산 두 번째 챔피언스리그를 차지했다.
바르사는 0–1로 뒤졌지만, 에투가 동점골을 넣은 후 단 3분 만에 역전골이 터졌다.
 
결국 에투의 이 시기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 2회 수상 
  • 2005 FIFA 올해의 선수상 3위
  • 2006 UEFA 올해의 공격수상 
  • UEFA 올해의 팀 선정 2회
한마디로, 이 남자는 정말 대단했다.
그때가 2006년, 에투의 나이는 고작 25살이었다.
 
 
 
 

과르디올라: 성공, 트레블, 그리고 갈등

이후 몇 시즌 동안 바르셀로나의 트로피 수는 다소 줄었다.
그토록 엄청난 성공 뒤에는 어느 정도의 하락세가 따라오는 법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리그 우승을 2년 연속 가져갔고,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두 시즌 연속으로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에투 입장에서는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2008년, 펩 과르디올라가 등장했다.
그는 이전 시즌까지 바르셀로나 B팀 감독이었으며,
1군의 문제점을 면밀히 관찰해온 상태였다.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시즌 1군의 선수들은 모두 훌륭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팀을 구성 중이다.
데쿠, 호나우지뉴, 에투는 우리의 계획에 없다.”
 
그는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이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충격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에투의 경우 그렇다.
 
과르디올라 부임 이전, 에투는 여러 차례 문제적 행동을 보였다.
교체 출전을 거부하거나, 호나우지뉴·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과 공개적으로 충돌한 일도 있었다.
규율과 통제를 중시하는 과르디올라의 스타일에서는 확실히 우려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투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미친 활약을 펼쳤다.
 
2008/09 시즌, 에투는 라 리가 36경기에서 30골 4도움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렇다면 이제는 완전히 신임을 얻었을까?
바르셀로나의 미래 계획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지켰을까?
 
스포일러 알림: 아니다.
 
시즌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과르디올라는 점점 리오넬 메시를 중앙 쪽으로 더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말은 에투가 점점 더 측면으로 밀려났다는 뜻이었다.
 
에투는 그걸 싫어했다.
 
리그에 3경기만 남겨둔 시점에서,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해 있었고, 상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당연히 과르디올라는 자신의 핵심 선수들이 그 경기를 위해 100%의 컨디션을 유지하길 원했다. 참고로, 그때 바르셀로나는 이미 리그와 코파 델 레이를 모두 우승한 상태였다. 메시와 차비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결승전을 위해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에투는 휴식을 거부했다. 디에고 포를란과 라 리가 득점왕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르디올라는 그걸 싫어했다.
 
그리고 에투가 그 시즌 모든 대회를 통틀어 36골을 넣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도 다시 골을 넣으며, 바르셀로나가 전무후무한 트레블(3관왕)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바르셀로나 커리어는 사실상 끝이 났다.
 
물론, 에투와 과르디올라의 관계가 이렇게 틀어지게 된 이유에는 더 많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의 의사소통이 완전히 무너진 이유를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뿐이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바르셀로나는 인터 밀란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영입했다. 이적료는 약 £57m로 알려졌지만, 그중 약 £39m만 현금으로 지급되었고, 나머지는 에투를 인터로 보내는 방식으로 충당됐다.
 
즉, 라 리가에서 한 시즌 전 30골을 넣고, 전체 144경기에서 108골을 기록한 선수가, 자신과 같은 나이이며, 포지션 융통성은 떨어지고 통계적으로도 더 낮은 성과를 거둔 선수의 이적을 위해 ‘거래용 카드’로 쓰인 것이다.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물론, 오해하지 말자. 즐라탄은 그때도, 지금도 훌륭한 선수다. 이건 그를 향한 비난이 아니다. 이는 과르디올라와 바르셀로나를 향한 비판이다. 하지만, 물론 모든 이야기에는 양쪽 시선이 있기 마련이다.
 
 
 
 

무리뉴: 인터 밀란, 트레블, 그리고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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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바르셀로나의 과르디올라를 떠나, 인터 밀란의 주제 무리뉴와 함께하게 된 에투는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과르디올라 체제에서 측면으로 밀려나는 걸 싫어하던 에투는, 무리뉴 아래에서는 그런 배치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실 그는 단순히 윙어로만 뛴 게 아니라, 때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심지어 즉석 오른쪽 윙백으로도 출전했다.
 
그가 윙백으로 뛰었던 그 유명한 한 경기는,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바르셀로나전이었다. 당시 티아고 모타가 세르히오 부스케츠를 거칠게 가격해 퇴장당한 후였다. 흠.
 
어쨌든, 인터 밀란은 결승에 진출했고, 바이에른 뮌헨을 2-0으로 꺾었다. 그 시즌 인테르는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제패했다.
2년 연속으로, 서로 다른 두 팀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선수는 지금까지도 단 한 명뿐이다 — 바로 사무엘 에투다. 레전드.
 
그 시즌 그의 개인 기록은 리그 12골 7도움으로 다소 줄었지만, 팀에 대한 전반적인 기여도는 오히려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다음 시즌, 주제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고, 인테르는 세리에 A 타이틀 방어에 실패했다.
에투는 리그에서 무려 21골 10도움을 기록하며, 미친 활약을 펼쳤지만, 인테르는 이브라히모비치가 이끄는 AC 밀란에 밀려 2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 시즌, 서른 살이 된 에투는 새로운 여정을 향해 떠났다.
 
 
 
 

커리어 후반과 은퇴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 4.webp.ren.jpg [풋볼 아이코닉] 사무엘 에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그 후 몇 년간, 그의 커리어는 서서히 황혼기로 접어들었다. 러시아, 카타르, 터키 리그를 오가며, 뛰었고, 은퇴의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이 시기 그는 잉글랜드에도 잠시 발을 디뎠다. 첼시와 에버튼에서 활약했지만, 이 시기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그 유명하고 짜증나게 웃긴 ‘노인 세리머니’의 탄생일 것이다.
 
나 역시 한때 FIFA 게임 중독자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세리머니는 ‘댑’이나 ‘빅맨 세리머니’ 같은 다른 짓궂은 세리머니보다 훨씬 더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도 멋진 세리머니였다.
 
아무튼, 2019년 9월 7일, 사무엘 에투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38세의 나이로 축구화를 벗었다.
 
물론, 그의 커리어 동안 다소 거칠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상급 선수 중 그런 사람이 없던가요? 실제로, 어느 산업의 정상에 오른 사람 중 그런 기질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의 화려한 커리어 동안, 에투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평생을 바쳐도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다.
순수하게 개인 기록과 업적만 놓고 본다면, 그가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거의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프리카 축구 선수 중 한 명, 아니 어쩌면 그중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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