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플레이어스 트리뷴] 제수스: 나의 가족, 그리고 아스날 식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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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희준아님구희준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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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더 플레이어스 트리뷴] 제수스: 나의 가족, 그리고 아스날 식구들에게 보내는 편지](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5/20251219/9291769109_340354_d62104f18c4ad53b7bdd3d4bcb6ed22b.png)
내게 축구 없는 하루는 끔찍한 날이다. 공 차는 법을 배운 이후로 줄곧 그랬다.
전방십자인대(ACL)가 파열된 후, 300일 동안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의사로부터 12개월간 결장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가족이었다. 가족이 없었다면 아마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회복 초기 몇 달 동안은 소파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침에 목발을 짚고 내려오면 치료, 식사, 다시 치료, 낮잠, 그리고 또 치료의 연속이 나의 세상이었다.
당시 3살이었던 딸 헬레나는 소파에 누워 있는 내게 장난감을 가져다주며 함께 놀자고 조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미안해, 아가야(meu amor). 아빠는 여기 누워 있어야만 해"라고 사과했다.
당시 딸에게 '나눔'의 개념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하루는 딸이 내 목발을 가져가더니 나를 흉내 내며 걷기 시작했다. 딸은 "나도 아야(boo-boo) 했어"라고 말했다. 내가 "그건 아빠 거야, 다시 돌려줘. 다칠 수도 있어"라고 말하자, 딸은 "아빠, 우리 무슨 이야기 했지? 나누어야지(share)"라고 대꾸했다.
TV로 아스날 경기를 지켜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분이었다. 모든 축구 선수가 이 불안감을 알 것이다. 나는 마치 팬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기회를 놓칠 때마다 쿠션을 집어 던졌다. 팀을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헬레나는 내가 화가 난 것을 보았지만, 아직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딸은 TV 앞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며 나와 아내에게 "모두 조용히 해봐. 나 노래할 거야"라고 선언하곤 했다. 내가 "우리 딸, 아빠 지금 일하는 중이야"라고 말해도 딸은 "나 지금 노래하고 춤출 거야! 조용히 해!"라고 외쳤다. 부카요 사카가 측면에서 공을 잡았을 때도 딸은 내 시야를 가로막고 춤을 추며 "아빠 안 보고 있잖아!"라고 장난을 쳤다. 나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2분쯤 지나 지루해지면 딸은 다른 방으로 가서 성경 만화 속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가져왔다. 딸은 양말 뭉치를 가져와 "엄마는 오늘 골리앗이야. 아빠는 일어설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곤 했다. 딸이 양말을 머리에 던지면 나는 쓰러지는 시늉을 해야 했고, 딸은 승리자처럼 내 위에 서 있었다. 처음 200번까지는 정말 귀여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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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딸을 소파에 앉히고 "우리는 저 빨간 옷 입은 사람들이야, 기억나지?"라고 설명해 주었다. 딸은 나와 닮은 선수를 보면 TV를 가리키며 "봐, 아빠가 뛰고 있어!"라고 외쳤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야, 아빠는 여기 있어. 저 사람은 아빠 친구야. 아빠는 다쳤잖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빠가 뛰는 걸 볼 수 있어"라고 설명해야 했다. 딸은 여전히 TV를 가리키며 "아빠"라고 불렀다.
부상이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은 후 조르지뉴가 가장 먼저 나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헬레나는 문앞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와서 우리 아빠 '아야'한 것 좀 보세요!"라고 말했다. 딸은 그들의 손을 잡고 환자인 나에게 데려와 내 무릎에 뽀뽀를 해주며"이제 좀 나았어?"라고 묻곤 했다.
딸은 모든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사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힘이 필요할 때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딸은 내가 축구와 통증에만 집착하는 것을 멈추고 삶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아내 라이아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녀는 가장 힘든 날들에 진정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때, 라이아네는 집 안을 뛰어다니며 내 무릎에 댈 얼음을 가져다주었다. 가장 어두웠던 시절, 그녀는 엄마이자 간호사였으며 축구를 함께 시청해 주는 유일한 동반자였다.
축구 선수로서 우리는 종종 실제 삶을 소홀히 하곤 한다. 부상 전의 나 역시 그랬다. 솔직히 말해 나는 가족에게 필요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아니었다.
브라질 빈민가(파벨라)에서 자라며 나는 늘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왔다. 모든 일에는 나중에야 알게 될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부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아내는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고 우리는 매우 불안해했다. 이전에 한 번도 밝힌 적 없지만, 첫째 헬레나의 출산은 우리에게 큰 트라우마였다. 당시 나는 축구 선수의 삶에만 매몰되어 아내 곁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아내는 가족과 6,000마일 떨어진 영국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채 홀로 출산해야 했다. 출산 중 심각한 합병증으로 과다출혈이 발생했고, 낯선 언어로 들려오는 의료진의 말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고 나는 무력했다.
다행히 출혈이 멈추고 헬레나를 무사히 낳았지만, 그 경험은 우리에게 상처로 남았다. 나는 딸을 단 하루만 안아보고 다음 날 국가대표팀 경기를 위해 짐을 싸서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축구는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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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업적인 꿈은 축구 선수였지만, 개인적인 삶에서의 꿈은 늘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랐기에 늘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8, 9살 무렵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 친구들의 아버지가 와서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내 아버지는 대체 어디에 계실까?"라고 자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 일어날 때 이미 일을 나가셨고, 내가 잠들 때까지도 남의 집 청소를 하느라 바쁘셨기에 온종일 어머니 얼굴조차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파우메이라스에서 뛰기 시작했을 때도, 골을 넣고 관중석을 올려다보아도 나를 지켜봐 줄 가족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예고 없이 경기장을 찾으셨다. 나는 골을 넣었고,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어머니를 발견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계시와도 같았으며, 내 인생 최고의 감정 중 하나였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내가 아버지가 된다면, 반드시 내 아이들 곁을 지켜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첫째 헬레나가 태어났을 때,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곁에 있긴 했지만 늘 비행기 시간에 쫓기며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 부상은 내게 일종의 축복으로 다가왔다. 아스날은 배려 깊게도 내가 브라질에서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며 재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번엔 모든 것이 달랐다. 헬레나는 몇 주 동안 엄마의 배를 문지르며 "동생아, 곧 나올 거니?"라고 묻곤 했다.
출산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아들 다니엘은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왔다. 보모가 헬레나를 병원으로 데려왔을 때, 딸은 방으로 뛰어 들어오며 "어머! 내 동생 다니엘이다! 정말 작아요! 안녕, 다니엘지뉴!"라고 외쳤다.
직업적인 면에서 내 꿈은 늘 축구 선수였지만, 개인적인 삶에서의 꿈은 늘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축구 선수로서는 프로가 되었을 때 단 한 번의 축복을 받지만, 아버지로서는 두 번의 축복을 받은 셈이다.
이번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초현실적인 시간이었다. 최고의 기량을 되찾았다고 느낀 순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 무릎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내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더 강해져서 돌아올 수 없을 정도의 시련은 주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아내와 아이들, 동료들, 그리고 헌신적인 아스날 의료진이라는 축복을 통해 내가 이 시기를 이겨내게 하셨다.
![image.png [더 플레이어스 트리뷴] 제수스: 나의 가족, 그리고 아스날 식구들에게 보내는 편지](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5/20251219/9291769109_340354_24493d60e2ae5727e0feb2a13c674273.png)
사람들은 내게 "왜 그냥 떠나지 않느냐? 사우디나 브라질로 돌아가는 건 어떠냐?"라고 묻곤 한다.
물론 언젠가는 나의 뿌리인 파우메이라스로 돌아가 모든 것을 매듭짓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재 아스날에서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떠나고 싶지 않다.
미켈 아르테타 감독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왔을 때, 내 목적은 단순히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단순히 득점자로만 보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지 않는다. 나의 가장 큰 강점은 팀의 우승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점이다. 맨체스터 시티 시절 나는 아구에로와 득점 부담을 나누기도 했고, 측면에서 뛰거나 신체 조건을 활용해 동료들을 돕기도 했다. 아르테타 감독이 몇 년 전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도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팀을 돕기 위해 반드시 9번 역할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곳 런던의 날씨가 좋아서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나는 이곳에서 역사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영국 팬들이 브라질 축구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어 짧은 역사 강의를 하나 덧붙이겠다. 내가 18세에 파우메이라스 1군에 합류했을 때, 팀은 22년 동안 리그 우승이 없었다. 우리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 우승을 차지했고, 그 후 파우메이라스는 끊임없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지금도 구단 복도에는 레전드들의 사진과 새로운 레전드들의 사진이 가득하다.
나는 아스날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잠자는 거인을 깨울 수 있다. 잉글랜드에 온 이후 감독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아니 요리사에게조차 매일 얼마나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 감독과 이 선수단이라면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나는 내 축구를 믿고,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팀의 리그 우승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헬레나에게 전하고 싶다.
"이제 아빠가 실제로 경기하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단다."
“이제 TV 앞에서 춤추는 건 잠시 멈추고 장난감도 치워두렴. TV 속에 나오는 건 아빠 친구가 아니라, 진짜 아빠니까. 드디어 때가 왔다.”
모두 사랑합니다.
가브리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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