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제타] 만프레디니: "벽돌공이자 배달원이었다. 19살에 우디네세에서 말을 한 마리 샀고, 100번 넘게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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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호등캔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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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eg [가제타] 만프레디니: "벽돌공이자 배달원이었다. 19살에 우디네세에서 말을 한 마리 샀고, 100번 넘게 우승했다."

토마스 만프레디니는 인생에서 수많은 장애물을 넘었다.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의 말인 베라비아를 돌보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저는 말을 운동선수처럼 대했습니다. 우디네세에서 첫 계약을 맺고 부린 첫 사치였죠." 반면 슈퍼카나 사치는 그와 맞지 않았다.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벽돌공과 피자 배달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돈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아킬레스건은 그의 가장 큰 적이자 장애물이었지만, 계속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 낸 것이기도 했다. 특히 피렌체 시절, 그는 특이한 알레르기 진단을 받았다. "조개나 갑각류를 먹으면 몸이 약해지고 열과 기관지염이 생겼습니다. 경기장 안에서 힘을 쓰면 숨이 쉬어지지 않았죠."
 
토마스는 산소 호흡과 종교 사이에서 계속 나아갔습니다. 당신의 등에는 특별한 문신이 있습니다.
"대천사 미카엘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깊이 믿고, 그분은 저의 수호천사입니다. 선과 악의 싸움을 상징하죠."
 
말은 당신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나요?
"전부였습니다. 저는 항상 경주마를 좋아했어요. 어릴 때 승마장에 자주 갔고, 우디네세에서의 첫 계약금으로 말을 한 마리 샀습니다. 19살 때였는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먹이를 주고 훈련시키며 돌봤습니다. 말을 운동선수처럼 대했죠. 이름은 베라비아였습니다. 경주에도 많이 나갔고 5년 동안 100번 넘게 우승했을 겁니다. 실력이 나쁘지 않았죠. 경기장에서의 정신력을 경마장으로도 옮기려 노력했습니다. 저는 사치에 빠진 그런 유형의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슈퍼카, 저택, 요트 같은 걸 좋아한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정비공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습니다. 저는 아주 겸손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4살 때 학교도 그만두셨는데…
"공부는 제 길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좀 벌기로 결심했죠. 오전에는 벽돌공 일을 하고 저녁에는 피자 배달원이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팁으로 주던 1000리레 (과거 이탈리아 화폐 - 역자 주 - ) 들을 기억합니다.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죠."
 
커리어를 되감아보죠. 당신은 등번호 9번으로 시작했습니다.
"스팔에서의 초창기에는 공격수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수비수로 포지션을 옮기게 되었죠. 풀백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중앙 수비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1999년 우디네세로 큰 도약을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단계를 아주 빠르게 뛰어넘었습니다. 19살 때 우디네세 소속으로 로마를 상대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데 카니오 감독님은 저를 크게 신뢰했고, 저를 수비진의 스토퍼로 기용했는데 아주 잘 뛰었습니다. 홈에서 0-2로 졌지만 저에게는 유일무이한 감동이었죠. 몇 년 후 우디네세 측에서 말해주길, 그 경기 전반전이 끝나고 로마의 스포츠 디렉터가 저를 영입하려고 라커룸까지 찾아왔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저는 스팔과 공동 소유 상태였고 다른 여러 팀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1999-2000 시즌은 아주 잘 풀렸습니다. 우디네세는 UEFA 인터토토 컵 출전권을 땄고, 저도 보니세냐 감독의 U-21 대표팀 명단에 들었습니다."
 
그 후 부상이 시작되었죠…
"아킬레스건은 저의 최악의 적이었습니다. 두 번이나 끊어졌죠. 우디네세에서는 소염제를 잔뜩 먹으며 버텼지만, 결국 정신과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거의 5년 동안 70경기 정도를 뛰었는데 대부분 무리하며 고통 속에서 뛰었습니다. 당시 세리에 A는 스타들이 즐비한 황금기였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공격수들이 당신을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죠. 우디네세에서 원하는 만큼 기여하지 못해 아쉽지만 부상이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산 시로에서 열린 인테르 원정 경기 후 리피 감독님이 저에게 해주신 칭찬은 기분 좋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피오렌티나와 함께 세리에 B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2004년 1월이었고, 경기를 뛸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에 B는 5개 팀이 승격하는 아주 수준 높은 리그였습니다. 팔레르모에는 토니가, 칼리아리에는 졸라가 있었죠. 피오렌티나에는 디 리비오부터 리가노까지 중요한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불안정한 컨디션 속에서 13경기를 뛰었습니다. 항상 신체적인 문제가 있었고 근육 파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레르기까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갑각류와 조개 알레르기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자주 열이 났고 달리려고 하면 금방 숨이 가빠졌습니다. 기후 때문에 카타니아로 옮기는 것을 권유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생선이 저에게 심한 기관지염을 유발하고 신체적으로 약하게 만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경기 중에 힘을 쓸 때마다 어김없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근육에 산소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죠.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카타니아에서 31경기 동안 3골을 넣었습니다."
 
아탈란타는 당신의 인생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입니다.
"2005년 여름 베르가모에 도착했는데, 당시 아탈란타는 세리에 B로 강등된 상태였습니다. 콜란투오노 감독님이 벨리니의 이적을 막으면서 제 자리가 없었고, 그래서 리미니와 볼로냐로 임대를 떠났습니다. 2년 후 아탈란타로 돌아왔고 델네리 감독님을 만나며 상황이 변했습니다. 감독님은 저를 신뢰하며 풀백에서 중앙 수비수로 변신시켰습니다. 제 커리어는 밀란을 상대한 산 시로 경기에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부상당한 탈라몬티 대신 교체로 들어갔는데, 플로카리와 란젤라의 골로 1-2 승리를 거뒀고 그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찼습니다. 몇 년 후에는 주장이 되었죠."
 
2011년 승부조작 혐의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국가대표 데뷔를 꿈꿨나요?
"지금과 비교하면 제 시절은 달랐습니다. 경쟁이 아주 치열했고 감독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는 선수들이 확고했습니다. 지금처럼 대여섯 경기만 잘하면 바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접근성이 좋은 대표팀이 아니었습니다."
 
제노아에서 가스페리니 감독과 함께 일했습니다. 어떤 관계였나요?
"비범하고 직선적인 분입니다. 그분과 잘 맞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면전에 대고 사실대로 말하는 분이었죠."
 
결코 잘 맞지 않았던 감독이 있나요?
"에우제비오 디 프란체스코입니다. 사수올로에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커리어의 마지막이었고 다른 대우를 기대했습니다. 제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와는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현재 만프레디니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마르케 주의 프로모지오네 (이탈리아 6부 리그) 소속인 루나노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힘들게 잔류했지만 올해는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
 
항상 감독을 원했나요?
"저는 열정과 취미로 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산 마리노 리그의 라 피오리타에서도 감독을 했습니다. UEFA 컨퍼런스 리그 예선까지 치렀지만 야망 문제로 그만두었습니다. 그곳은 강등이 없거든요. 다른 리그에서 저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마추어 리그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2022년 리초네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왜였나요?
"제 아내 덕분에 시장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포츠 관점에서 도시를 성장시키고 시설 투자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로 출마했습니다. 당선되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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