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홈] 사미르 타바코비치: 견고하고 경합에 강한 전사

작성자 정보

  • 호주이치킨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1.webp.ren.jpg [공홈] 사미르 타바코비치: 견고하고 경합에 강한 전사.

그의 커리어는 유고슬라비아 최상위 리그의 FK 슬로보다 투즐라와 NK 벨리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는 전쟁의 혼란을 가까이에서 겪었다. 그러던 중 스위스 이적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FC 바젤에서 그는 행복을 찾았다. 바젤은 당시 나티오날리가 B (2부) 에서 수년간 머물다 다시 나티오날리가 A (1부) 로 승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데얀 사비체비치,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즈보니미르 보반, 다보르 슈케르 등, 사미르 타바코비치는 젊은 시절 이 전설적인 선수들을 상대하며 경기장을 누볐다. 1992-93 시즌 종료 후, 그는 전문 기자단이 선정한 크로아티아 최고의 중앙 수비수로 뽑혔다. 바로 이 시기에 스위스의 FC 바젤은 수비 중심을 강화할 인재를 찾고 있었다. 아드미르 스마이치와 그의 동료들은 크로아티아에 매우 영리하게 경기를 운영하며 1대1 경합에서 거의 지지 않는 강력한 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바젤 구단 운영진의 요청에 따라 아드미르 스마이치는 유명 기자인 세나드 시나노비치에게 사미르 타바코비치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바코비치는 아름다운 나라 스위스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역은 내전으로 들끓고 있었다. BSC 올드 보이스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루가노에서 개최) 등을 상대로 한 테스트 경기 후, 바젤 운영진은 확신했다: 이 남자를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

 

스포츠적으로는 계획대로 흘러갔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타바코비치에게 초창기는 힘든 시기였다. "저는 임시 4개월 계약으로 안전한 스위스에 살게 되었지만, 제 가족, 특히 부모님은 끔찍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위험한 지역에서 버텨야 했습니다. 때로는 고향과 전화 연락조차 되지 않아 심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당시 타바코비치는 스스로 체력 상태가 100%가 아니라고 느꼈다. 다행히 그는 매일 많은 것을 배웠다. 독일어와 영어를 익히며 다른 바젤 선수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아드미르 스마이치와 블라도 초시치는 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어 코스를 마련해 준 팀 매니저 구스타프 누스바우머도 마찬가지였죠. 이분들 덕분에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최우선 과제는 승격이었다. 

 

당시 FC 바젤은 수년째 승격을 노렸지만 실패를 거듭하던 잠자는 거인이었다. 그러던 1993-94 시즌, 환상적인 성적 끝에 옛 장크트 야콥 경기장에서 FC 취리히와의 경기가 열렸다. 수차례의 유럽컵 결승과 국가대표 경기가 치러졌던 이 경기장은 4만 2126명의 관중으로 가득 찼다. 타바코비치는 회상한다. "이기면 꿈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디 안드레이 감독님은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더비는 1-1로 끝났습니다." 이제 카루주의 스타드 드 라 폰테네트에서 열리는 경기가 남았다. 평일 경기라 원정 팬은 적었다. 타바코비치는 경기 중 무릎이 뒤틀리는 부상을 입었지만 끝까지 버텼다. 결국 다리오 주피의 골로 1-1 무승부를 거두며 승격을 확정 지었다. 제네바 호숫가의 작은 경기장에서 바젤은 대업을 완수했다.

 

전설적인 승격 축하 파티 

 

그날 이후 벌어진 일은 말 그대로 전설적이었다. 전세기를 타고 제네바에서 바젤로 돌아온 선수들은 늦은 밤 바르퓌 광장에서 마치 유럽 챔피언처럼 환영받았다. 엄청난 인파였다. 아드미르 스마이치와 외르얀 베리의 지휘 아래 바젤의 영웅들이 등장하자 팬들은 유명한 곡인 시에라 마드레의 멜로디에 맞춰 다시는, 다시는 나티 B는 없다라고 노래했다. 팬들은 타바코비치에게 기념품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유니폼, 반바지, 축구화, 스타킹까지 전부 선물로 줬습니다. 이 거대한 역사에 일조할 수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라고 그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당시 승격은 너무나 중요했기에, 한 달 전 컵대회 준결승에서 하위 리그 팀인 FC 샤프하우젠에 패했던 아픔도 잊게 할 정도였다.

 

컵대회 이야기를 하자면: 사미르 타바코비치는 13번째 페널티 킥을 차야만 했다. 사실 그는 승부차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키커 명단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타바코비치는 "좋은 페널티 킥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약하게 찼어요." 라며 자기 비판적으로 고백했다. "컵대회 결승전에 나갔다면 정말 멋졌을 겁니다. 결승에서 그라스호퍼를 만났다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거예요. 컵대회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이 컵대회 탈락은 타바코비치에게 오랫동안 큰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날 밤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바젤 선수는 타바코비치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의 실축에 앞서, 평소 페널티 킥에 매우 강했던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 다리오 주피 또한 골망을 흔드는 데 실패했었다.

 

유럽 무대에서의 활약 

 

이 무렵 FC 바젤은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5-96년 여름, 마침내 때가 왔다. 과거 유러피언컵에서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를 상대로 3만 500명의 관중 앞에서 1-0 승리를 거둔 이후, FC 바젤이 마침내 다시 한번 국제 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무대는 UEFA 인터토토 컵이었다. 로트블라우 (바젤의 애칭 - 역자 주 - ) 는 셰필드 웬즈데이 FC를 만났다. 52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FC 바젤은 알렉상드르 레이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승리했다. 기세를 몰아 폴란드의 전통 강호 구르니크 자브제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1-2로 승리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를스루에 SC전과 오르후스 원정 경기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일 년 뒤, 베비 (바젤 사람들을 일컫는 애칭 - 역자 주 - ) 들은 다시 유럽 무대에 나섰다. 당시 팀은 샤흐타르 도네츠크 (2-2 무승부), 안탈리아스포르 (이스파르타에서 열린 원정 경기, 2-5 승리), 아타카 아우라 민스크 (5-0 승리) 를 상대로 2승 1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라인강 인근의 팬들은 볼고그라드에서 열릴 SK 로토르와의 원정 경기에 열광했다. 카를 엥겔 감독이 이끄는 바젤은 센트럴 스타디움의 2만명 관중 앞에서 1-2로 앞서가는 등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결국 러시아 팀의 우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바젤에서는 다비데 올란도와 가에타노 잘란차가 득점했고, 홈팀 로토르는 니데르하우스, 예시포프, 베레텐니코프가 골을 기록했다. 조금만 더 운이 따랐다면 바젤은 토너먼트 단계에서 린츠 ASK와 맞붙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거기서도 이겼다면, 또 어떤 역사가 쓰였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활동 기간 동안 동료들 사이에서 타바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페어플레이를 실천하고 훌륭한 수비를 보여주는 팀의 상수로 자리매김했다. 과거 <바즐러 차이퉁>의 미하엘 마르틴 기자는 그를 이렇게 정확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여기에 안탈리아스포르와 FC 바젤의 UEFA 인터토토 컵 경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바젤의 골문에는 갑자기 새로운 골키퍼가 등장했는데, 바로 훗날 나이지리아 국가대표가 된 아이크 쇼룬무였다. 주전 골키퍼였던 슈테판 후버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왜 이런 선수 교체가 일어났는지, 왜 그런 작전이 실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미르 타바코비치조차 끝내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바젤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견고함과 강력한 경합 능력을 갖춘 이 수비수 (그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구시가지가 있는 두브로브니크를 최고의 휴양지로 꼽는다) 는 1998-99 시즌을 위해 발트호프 만하임으로 둥지를 옮겼다. 그는 임대 선수 신분으로 지역 리그 13경기와 컵대회 5경기를 소화했다. 이후 그는 스위스 챌린지 리그 (2부) 의 FC 샤프하우젠과 FC 방엔 안 데어 아레에서 두 시즌을 더 뛰었다. 타바코비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축구계에 계속 남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UEFA 프로 라이선스를 취득했죠. 감독직 제안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가족들이 이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에게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이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는 FC 콘코르디아 바젤의 U-16 팀과 1군 팀, 그리고 FC 블랙 스타즈에서 지도자로 활약했다. 현재 그는 다시 콩겔리 (콘코르디아 바젤의 애칭 - 역자 주 - ) 의 1군 팀을 이끌고 있다. 그는 감독으로서 꾸준히 유망한 재능들을 발굴해 왔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제자는 도나트 루다니다. 루다니는 타바코비치의 지도를 거쳐 아라우, YB 등 여러 클럽을 거쳤으며, 현재는 FC 시옹 소속으로 슈퍼 리그 (1부) 무대를 누비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미르 타바코비치의 가족생활에 대해 두세 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는 바젤에서 만난 아내 아밀라와 1996년 결혼하여 성인이 된 두 아들 아마르 (24세) 와 아니스 (19세) 를 두고 있다. 두 아들은 즐거움을 위해 축구를 하기도 한다. 프로 선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타바코비치는 그것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두 아이 모두 학업을 마쳤고, 이제 각자의 직업적 경로를 잘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

 

https://www.fcb.ch/aktuell/news/alle-news/portraet-samir-tabakovic/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14,751 / 1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
알림 0
베팅 슬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