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애슬레틱] ‘스카우즈는 잉글랜드인이 아니다’: 리버풀과 잉글랜드 대표팀의 어려운 관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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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Hughes, Andy Jones and Tony Evans
Sept. 9, 2025 1:11 pm GMT+9
토마스 투헬 감독이 이번 달 월드컵 예선을 위해 잉글랜드 대표팀을 선발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는 리버풀 선수가 단 한 명도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리버풀이 지난 시즌 프리미어 리그를 압도적으로 제패했을 뿐 아니라 이번 시즌 들어 치른 경기에서 100%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다소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투헬이 고려할 만한 리버풀 선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커티스 존스는 이번 시즌 리버풀이 치른 네 차례의 공식 경기 중 두 번만 선발로 나섰지만, 그럼에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왔기에 그의 제외는 다소 의외였다.
게다가 잉글랜드 명문들 중 리버풀의 선수만 선발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시 소집 인원이 전무했다.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전통의 두 북서부 명문 선수들이 모두 대표팀 명단에서 빠진 것은 1992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 불평하는 리버풀 팬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반응은 리버풀 팬들, 특히 현지에 거주하는 팬들과 잉글랜드 대표팀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 배경에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스포츠적 이유가 얽혀 있다.
이 기사는 The Athletic의 팟캐스트 Walk On의 대화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으로, 잉글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클럽인 리버풀과 국가대표팀 간의 다이나믹한 역학 관계를 다뤄보고자 한다.
토니 에반스: 우리 청취자들 중 많은 분들은 리버풀이 왜 잉글랜드 대표팀과 문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아마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스카우즈(* 역주 - 리버풀 출신을 일컫는 말)는 잉글랜드인이 아니다(Scouse not English)’라는 표현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다. 이는 어떤 이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여기엔 확실히 역사적인 근거들이 많다.
사이먼 휴즈: 리버풀이라는 도시와 영국 나머지 지역들간의 복잡한 관계를 똑부러지게 설명하거나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킨 몇 가지 사건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엔, 지난 20~25년 사이에 이 관계의 골은 더 깊어지고 심화된 것 같다. 리버풀은 항상 일종의 '이질감'을 느껴왔다. 리버풀의 위치 때문이다. 지리적 요인만으로도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리버풀은 아일랜드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19세기 말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많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정착함에 따라 이민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면서 아일랜드적 정체성을 강하게 띠게 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영국적 정체성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게다가 리버풀은 대규모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전세계의 여러 지역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다른 지역들과는 극명하게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79년부터 1983년까지의 시기가 분수령이었다. 리버풀이 본인들을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리고 타지역 사람들이 리버풀을 어떻게 보는지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이 이 시기에 끼쳐졌다. 대처리즘(* 역주 -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정치 노선으로, 영국 보수당의 주요 계파 중 하나)의 부상, 도심 지역의 봉기(언론은 이를 폭동이라 불렀다), 극렬한 좌파 정치 (급진 사회주의 정당) '밀리턴트'의 탄생, 헤이젤 참사, 마약의 범람, 힐스버러 참사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이런 사건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빚어냈고, 리버풀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하지만 나는 리버풀 사람들, 특히 그 시기를 성인으로서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최근 10~15년 전, 보수당이 10년 이상 집권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다시 권력을 되찾은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문제들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지만, 이 시점에서 영국 내 다른 대부분의 지역들은 토리당(* 역주 - 영국 보수당의 전신)에 표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여전히 그러지 않았다. 이어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독립 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리버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참사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입증시켜 주었다. 나는 이것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다시금 논의를 불러 일으키고, 자신들이 영국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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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안필드에 등장한 반보수당 배너 (Oli Scarff/AFP via Getty Images)
나는 1983년생으로, 1990년 월드컵을 통해 축구에 입문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부터 리버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만 말이다. 1990년 월드컵은 정말 큰 행사였고, 잉글랜드 대표팀은 그 대회에서 핵심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리버풀 시내의 펍에서 사람들이 잉글랜드 경기를 보며 응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은 정말로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관광객과 학생들이 모이는 콘서트 스퀘어 같은 광장에서는 대형 스크린으로 잉글랜드 경기를 틀고 사람들이 그걸 보기도 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문화적 이벤트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다. 과거에도 반잉글랜드 정서가 존재하긴 했지만, 나는 이러한 이유로 지난 10~15년 사이에 그 정서가 더욱 심화되었다고 느낀다.
리버풀 사람으로서, 나는 커가며 내 출신에 대한 시선들을 외지에서 늘 분명하게 느꼈고, 그것은 항상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단절감을 느꼈다.
대학 시절 나는 셰필드에서 잠시 지냈고, 그곳에서 일하기도 했다. 셰필드는 힐스버러 참사 때문에 리버풀과 특별한 유대감이 있는 도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사람들은 항상 나를 다르게 취급했다. 이런 경험이 내가 잉글랜드 대표팀에 무관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오히려 잉글랜드가 패배할 때, 리버풀을 폄하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에반스: 내가 자랐던 한 리버풀의 동네는, 내가 태어나기 30년 전까지 실제로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의 하원의원이 살던 곳이었다. 나는 내가 잉글랜드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는 채로 자랐다. 1980년대에는 리버풀 억양이 범죄시되었고, 그 때는 도시 전체가 불량 도시로 낙인찍히던 시절이었다.
휴즈의 말이 맞다. 지난 20년간 리버풀 사람들은 ‘차별받았던’ 경험을 오히려 포용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재발견해온 것이다.
앤디 존스: 나는 어릴 때부터 잉글랜드 대표팀이 못마땅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리버풀 선수들이 대표팀에 갔다가 꼭 부상을 당해서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차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SNS 시대가 되면서 ‘스카우즈는 잉글랜드인이 아니다’라는 정서가 더욱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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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콜롬비아를 상대로 한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 전, 성 조지의 십자가 모자이크를 펼친 콥 스탠드 (Mike Egerton/EMPICS via Getty Images)
어린 시절에는 월드컵과 유로가 내가 기억하는 가장 큰 축구 이벤트였기에 그것들이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프레스턴에 살 때는, 큰 대회가 열리면 펍에가서 맥주를 먹곤 했지만 잉글랜드가 우승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너무 일반화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리버풀을 좋아하고, 리버풀 출신이 아닌 사람들 또한 리버풀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리버풀을 싫어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리버풀 풋볼 클럽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팬들까지도 혐오한다. 그로 인해 거리감이 생기고, 이는 잉글랜드 국가가 연주될 때 리버풀 팬들이 야유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는 SNS 덕분에 이런 장면들이 훨씬 더 널리 퍼지고 있다.
리버풀에는 잉글랜드 대표팀이 잘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일단 나는 리버풀의 펍에서 잉글랜드 경기를 보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잉글랜드가 체면을 구기며 패배하면 꽤 즐겁기까지 하다. 리버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분노에 찬 모습을 보는 것이 재밌기 때문이다.
휴즈: 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2016년 리버풀과 맨체스터 시티간의 리그컵 결승을 취재차 관람했을 때, 국가가 연주되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양심적 거부자’로서 앉아 있었다. 당시 토니가 나와 함께 기자석에 앉아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토니는 내 소신을 존중해주었지만, 주위의 다른 기자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바라봤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야유 소리가 정말로 크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아마도 브렉시트를 앞두고 있었고 힐스버러 조사도 진행되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논의를 통해 세상 속에서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고, SNS를 통해 목소리를 낼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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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커뮤니티 실드에서도 일부 리버풀 팬들은 국가 연주에 야유를 보냈다 (Chris Brunskill/Fantasista/Getty Images)
리버풀은 흔히 좌파의 도시로 불리곤 한다. 그러나 나는 사실 리버풀을 좌파 도시라기보다는, 저항의 도시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최근 리버풀 일부 지역에서는 성 조지의 십자가 깃발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가 보인다. 현재의 노동당 정치가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실망시켰다고 느끼는 지역 주민들의 정서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반스: 맞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리버풀에도 자신을 잉글랜드 사람이라고 여기며 잉글랜드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지 나는 그들 중 한 명이 아닐 뿐이다.
(Top photo: Odd Andersen/AFP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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