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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애슬레틱] 뉴캐슬을 떠나 리버풀로 이적해 비틀즈 앨범 커버까지 장식했던 한 스트라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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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ng [디 애슬레틱] 뉴캐슬을 떠나 리버풀로 이적해 비틀즈 앨범 커버까지 장식했던 한 스트라이커

 
Michael Walker
Aug. 28, 2025 1:12 pm GMT+9
 
 
리버풀의 구애를 받던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센터 포워드는 자신을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멀리 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이미 Liverpool Echo는 이 충격적인 이적 사가를 시간 단위로 쪼개 보도하고 있었다. 구애를 받던, 그리고 자신도 이적을 원했던 이 스트라이커는 그래서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으로 향했다. 바로 영화관이었다.
 
그날은 목요일 오후였다. 알버트 스터빈스와 그의 아내 앤은 어둠 속에서 만족스럽게 점심 시간대의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자 그들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열기는 들끓고 있었다. 스터빈스가 이적 요청서를 제출한 지 24시간 만에, 무려 18개 구단이 뉴캐슬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웃는 암살자’라고 불릴 만큼 경기장에서 치명적인 침착함을 자랑했던 스터빈스는, 경기장 밖에서도 나름의 침착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 간 것은, 알렉산데르 이삭이 홀로 훈련하기 위해 전세기를 타고 산세바스티안으로 떠난 것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이삭의 행동에 타인사이드 언론은 '바스크 분리주의자'라는 기발한 헤드라인까지 내걸었다. 그러나 스터빈스와 이삭의 사례는 충분히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기도 하다. 동시에 이들은 축구 문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까지 보여준다.
 
1946년 9월, 스터빈스의 영입을 열망한 열여덟 개 구단 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던 두 팀이 있었다. 하나는 에버튼이었고, 다른 하나는 2025년의 이삭 건과 같이 리버풀이었다. 스터빈스가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떠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들은 머지사이드 양 구단의 대표들은 서둘러 잉글랜드 북동부로 올라왔다. 그리고 스터빈스가 영화관에 앉아 있는 동안, 두 구단의 대표는 이미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수석 디렉터 스탠 시모어와 함께 이사회실에 들어와 있었다.
 
목요일 Liverpool Echo의 메인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뉴캐슬의 골드 러시: 에버튼과 리버풀이 스터빈스 영입 경쟁에서 선두를 다투다.”
 
 
image.png [디 애슬레틱] 뉴캐슬을 떠나 리버풀로 이적해 비틀즈 앨범 커버까지 장식했던 한 스트라이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의 스터빈스 (Barratts/PA Images via Getty Images)

 

 

두 구단은 재빨리 뉴캐슬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금액을 맞춰줬다. 그 결과 선덜랜드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구단이 영입전에서 탈락했다. 뉴캐슬의 오랜 라이벌 선덜랜드는 전화를 걸어 마치 미술품 경매에 나선 듯 입찰을 올렸다.
 
이적료는 £13,000였다. 그리고 세 구단은 모두 그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 축구 역사상 단 한 건의 이적만이 그보다 더 큰 이적료를 발생시킨 바 있었다. 울브스로부터 브린 존스를 영입하기 위해 아스날이 지불했던 £14,000였다.
 
하지만 그것도 1938년의 일이었다. 당시엔 말 그대로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첫 번째 풀 시즌이 치러지고 있던 것이다. 전쟁이 아닌 축구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채우고 있었고, 이를 반영하듯 관중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머지사이드의 양 구단 모두 전후의 첫 번째 잉글랜드 챔피언이 되기를 원했다. 에버튼은 전쟁 직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1938-39 시즌의 챔피언이었지만, 리버풀은 1923년 이후 리그 우승이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그들은 직전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0-5로 패한 뒤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당시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2부 리그에 있었다. 그러나 ‘미스터 뉴캐슬’ 시모어는 축구의 사업적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당시 27세였던 스터빈스라는 선수가 뉴캐슬이 보유한 가장 값진 자산, 즉 전성기에 접어든 골잡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타인 강변 월샌드에서 태어난 스터빈스는 어린 시절을 미국 뉴욕과 디트로이트에서 보냈다. 12세 무렵 귀국한 그는 골수 뉴캐슬 팬이었다. 영국 남성 평균 키가 5피트 6인치에서 7인치(167~170cm)에 불과했던 그 시절, 그의 키는 약 6피트(183cm)에 달했고, 신발은 11 사이즈를 신었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빨랐고, 골문 앞에서는 대담했다. 뉴캐슬에서 218경기를 뛰며 237골을 넣은 그는, 해트트릭만 29회를 기록했다.
 
물론 그의 골들은 대부분은 전시 리그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의 수준은 높았다. 그는 과거 “전시 리그와 그 이후의 축구 사이에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전시 잉글랜드 대표팀으로도 한 차례 뛰었다. 다만, 당시 잉글랜드의 확고한 9번은 토미 로튼이었다.
 
미래에 뉴캐슬 감독이 되는 바비 롭슨 경은 자신의 회고록 My Kind of Toon에 이렇게 썼다. “알버트 스터빈스는 그 시대의 앨런 시어러였다. 알버트는 나의 첫 번째 영웅이자, 첫 번째 아픔이었다.”
 
 
image.png [디 애슬레틱] 뉴캐슬을 떠나 리버풀로 이적해 비틀즈 앨범 커버까지 장식했던 한 스트라이커
뉴캐슬을 대표하는 옷을 입은 스터빈스 (Barratts/PA Images/Getty Images)
 
£13,000의 이적료가 합의되자, 뉴캐슬은 동네 영화관에 전화를 걸어 스터빈스를 불러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월샌드 자택으로 택시까지 보냈지만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 이사회실에선 네 시간 동안 담배 연기만이 뿜어져 나왔고, 결국 거기 모인 사람들은 카드를 치기 시작했다.
 
스터빈스는 자신이 얼마나 값진 선수인지,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Daily Mail에 이렇게 말했다. “전 그저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갔을 뿐입니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니, 구단이 저를 찾고 있다고 이웃이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그 때 그냥 버스를 타고 간겁니다.”
 
마침내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나타난 스터빈스는 리버풀 회장 빌 맥코넬과 감독 조지 케이, 그리고 에버튼의 사무총장 겸 감독 테오 켈리를 만났다. 시모어가 어떤 구단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묻자, 스터빈스는 그날의 극적인 분위기에 화답하듯 이렇게 대답했다.
“동전을 던지죠. 앞면이 나오면 리버풀, 뒷면이면 에버튼.”
 
앞면이 나왔다. 유소년 시절, 스터빈스가 첫 번째 프로 계약을 맺기도 했던 선덜랜드는 아예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그가 전쟁 중 선덜랜드에서 조선소 제도사로 일했음에도 말이다.
 
맥코넬과 케이는 안필드의 계획을 설명했고, 그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붉은색을 선택했다. 잭 발머와 같은 그의 친구들도 이미 리버풀에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결국 난 에버튼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리버풀의 제안에 엄청나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니까.”
 
물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리버풀과 스터빈스 사이에 오래 전부터 조용한 사전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것은 그의 두 번째 이적 요청이었다. 스터빈스의 두 번째 요청이 있기 이틀 전, 이미 뉴캐슬은 미들즈브러에서 새로운 센터 포워드 조지 스토바트를 영입해 두었다. 3주 뒤,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스터빈스가 남긴 £13,000으로 브래드포드 파크 에비뉴에서 뛰던 빛나는 렌 섀클턴을 데려왔다. 스터빈스가 구단을 상대로 싸울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은 이미 짜여 있었다. 뉴캐슬도 불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13세 소년 바비 롭슨에게는 다른 얘기였다. “뉴캐슬이 그를 리버풀에 팔았을 때, 나는 배신당했다고 느꼈어.”
 
 
image.png [디 애슬레틱] 뉴캐슬을 떠나 리버풀로 이적해 비틀즈 앨범 커버까지 장식했던 한 스트라이커
1949년 9월의 리버풀, 하단 중앙이 스터빈스, 상단 제일 오른쪽이 밥 페이즐리 (Allsport Hulton/Archive)
 
 
목요일 오후 뉴캐슬의 영화관에 있던 스터빈스는 48시간 뒤, 볼턴 원정을 떠난 리버풀의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비가 내렸지만, 번든 파크에는 스터빈스를 보기 위해 3만5천 명이 모였다. 당시 Liverpool Echo는 이렇게 전했다. “이스트 랭커셔 로드는 리버풀에서 출발해 볼턴까지 가는 차량으로 꽉 막혔다.”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진흙탕 속에서 승리를 견인한 스터빈스”. 1-1로 맞서던 경기 82분, 스터빈스가 결승골을 넣었던 것이다. (리버풀이 경기 막판에 세 번째 골을 추가했지만, 기사는 이미 그 전에 다 작성되었을 것이다.)
 
완벽한 출발이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이었고, 또 전쟁 때문에 스터빈스의 활약을 직접 본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수많은 이들이 그를 보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 Echo는 이렇게 묘사했다. “스터빈스는 권투 선수 같은 얼굴에, 길고 큰 보폭을 가진, 체구가 큰 사나이다. 그에게 별명이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의 황금빛 머리칼을 본 스피온 콥으로부터, 그는 곧 ‘생강(Ginger)’이라고 불릴 것이 틀림없다.”
 
이어진 월요일의 헤드라인, 그가 남긴 강렬한 인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실수하지 말라. 스터빈스는 클래스를 가졌다.”
 
그리고 그 열풍은 스터빈스의 안필드 홈 데뷔전에서 곧장 확인됐다. 그 다음 토요일, 상대는 에버튼이었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열린, '모든 것을 다 내거는' 더비였다. 현지 신문들은 오전 9시 30분부터 줄이 늘어섰고, 오후 2시 30분에 입장이 마감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경기는 0-0 무승부였다.
 
현지 리포터는 당시 줄을 선 팬들과 인터뷰를 나눴다. 부틀 출신의 제임스 맥도널드는 리버풀과 에버튼 모두를 “공정하게” 응원하는 팬이었다. 그는 리버풀 경기를 "50년만에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팬, 윌리엄 힙은 전역 군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겪은 자신에게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것은 견딜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축구가 보여주는 과도한 자기 과대평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스터빈스가 데뷔 시즌에 터트린 24골 중 첫 번째 골이 볼턴에서 나왔을 때, 리버풀은 8위였다. 그가 득점을 터트리며 12월 선덜랜드 원정에서 4-1로 승리했을 때, 리버풀은 2위였다. 그리고 1947년 5월 말, 울브스 원정에서 스터빈스가 2-1 승리를 만드는 결승골을 넣었을 때, 리버풀은 1위가 되었고, 챔피언에 올랐다. 버스비, 영화표,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의 기다림. 그 모든 것이 보람차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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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하이버리에서 아스날의 레슬리 컴튼과 경합하는 스터빈스 (Edward Miller/Keystone/Getty Images)
 
 
리버풀은 또한 FA컵에서도 4강에 올랐다. 8강에서 스터빈스가 버밍엄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덕분이었다. 8강에서 그는 빌리 리델의 크로스를 다이빙 헤더로 연결하며 득점을 터트렸고, 곧장 안필드의 관중들 속으로 들어갔다. '눈 속의 골(Goal in the Snow)'이 터진 날이었다.
 
당시 뉴캐슬 또한 FA컵 4강까지 올랐기에 ‘스터빈스 결승전’이 열릴 수도 있었지만, 리버풀과 뉴캐슬은 모두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리고 뉴캐슬이 4강에서 패한 뒤, 그들의 주장 조 하비와 스터빈스의 대체자로 영입된 섀클턴은 “파업”을 선언했다. 섀클턴은 자서전을 통해 당시 구단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언론들이 환장할 스토리”라고 썼다. 이삭은 낯설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안필드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도 스터빈스는 다시 24골을 넣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그 우승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리버풀은 11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스터빈스의 폭발적인 인기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지역 문화에까지 스며들 정도였다. “A-L-B-E-R-T, Albert Stubbins is the man for me”라는 그의 응원가는 머지사이드의 모든 놀이터에서 울려 퍼졌다. 페니 레인 근처에서 자라난 존 레논도 분명히 이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스터빈스와 이삭이 흥미롭게 여길지도 모를 사실이 하나 있다. 레논은 뉴캐슬 로드(* 역주 - 리버풀 웨이버트리에 있는 도로) 9번지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10월 9일에 태어났고, 훗날 1974년에 발매한 솔로 앨범 Walls and Bridges의 수록곡 #9 Dream을 썼다. 그 앨범 속지에는 어린 시절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이 실렸다. 1952년 FA컵 결승, 뉴캐슬 대 아스날의 경기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거기엔 뉴캐슬의 9번 재키 밀번이 등장한다. 레논은 말했다. “9는 늘 나를 따라다니는 숫자야.”
 
폴 매카트니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967년, 비틀즈가 그들의 대표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커버에 실을 71명의 얼굴을 고를 때, 알버트 스터빈스가 축구 선수로는 유일하게 선택되었다. 비틀즈는 사인 앨범을 그에게 보냈고, 매카트니는 축전을 썼다. “축구를 통해 찬란한 세월을 보내오신 알버트, 멋졌습니다. 앞으로도 활발한 모습 보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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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커버, 조지 해리슨과 말렌 디트리히 사이에 묘사된 스터빈스(뒤로 넘긴 머리에 미소를 짓고있는) (Michael Ochs Archives/Getty Images)
 
 
그 무렵, 스터빈스는 타인사이드로 돌아와 스포츠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안필드에서 총 6시즌을 보냈고, 1950년 FA컵 결승전에서도 뛰었다. 그러나 1948년, 그의 계약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했고 그는 동시에 부상까지 겪게 되었다. 결국 그는 타인사이드로 돌아와 게이츠헤드 FC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으며, 1950년 12월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리버풀 경기에 결장하도 했다. 이에 1951년 2월, 미들즈브러가 리버풀에 £18,000을 제안했지만 이적은 성사되지 않았다.

(* 역주 - 은퇴 후 기자가 되길 원했던 스터빈스는, 리버풀 입단 당시 빌 맥코넬 회장으로부터 풋볼 에코에 칼럼을 쓸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맥코넬 사후 리버풀 보드진이 약속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여 1948-49 시즌 계약 분쟁에 휘말림. 그러나 구단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었고, 개인적인 문제였기에 세간에 분쟁 사실이 공개되진 않았고, 당시 스터빈스와 가족들이 향수병을 겪는다는 추측이 많았음.)
 
1953년 9월, 34세가 된 스터빈스는 리버풀을 떠나 북동부의 논리그 팀 애싱턴과 계약했다. 이적료는 £3,000였다. Morpeth Herald는 이렇게 보도했다. “알버트는 선수 겸 코치로 합류하며, 그가 늘 뛰고 싶어했던 센터 하프(* 역주 - 센터백) 자리에서 뛸 것이다.”
 
이는 누군가에겐 놀라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Liverpool Daily Post는 그가 떠나기 직전, 스터빈스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내”
 
선수 은퇴 후 1960년, 스터빈스는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사커 리그의 뉴욕 아메리칸스 코치직을 맡았다. 당시 New York Times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축구를 모르는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사커'는 한 팀에 11명이 뛰는 경기입니다.”
 
곧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북동부 지역에서 취재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수십 년 동안 기자로 활동했다. 뉴캐슬 훈련장에서 그가 어린 시절의 폴 개스코인과 함께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스터빈스는 같은 북동부 출신이자, 1947년 리버풀 리그 우승을 함께 이끌었던 밥 페이즐리와도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축구에 열광하는 두 북부 도시, 리버풀과 뉴캐슬을 잇는 살아 있는 연결고리였다. 2025년 8월의 상황과는 달리, 양 구단 사이에 고대부터 내려온 적대감 따위는 없었다. 
 
전설적인 리버풀 선수였던, 그리고 존경받는 뉴캐슬 전 선수이자 감독인 케빈 키건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84년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헬리콥터 은퇴식(* 역주 - 1984년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 리버풀을 초청해 은퇴식을 치르며, 헬리콥터를 타고 센터서클에 내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줌)'을 치렀다. 더 최근에는 라파 베니테스가 양쪽 팬들로부터 모두 사랑받기도 했다. 물론, 이삭의 경우에는 그 불편한 이적이 성사되더라도, 두 구단으로부터 그런 따뜻한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스터빈스는 2002년 12월 말 세상을 떠났다. 타인머스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롭슨도 참석했다. 그리고 이후 열린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홈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은 모두 검은 완장을 차고 그를 기렸다.
 
원정팀은 리버풀이었다.
 
(Top photos: Dennis Oulds/Central Press/Getty Images; design: Eamonn Da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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